야마무라 신지로 (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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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무라 신지로 (1933년)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3년 지바현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 대학을 중퇴하고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여, 1964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1970년 일본항공 351편 납치 사건 당시 인질을 자처하여 북한으로 향하는 용감한 행동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농림수산상, 운수상을 역임하며 정계에서 활동했으나, 1992년 자택에서 정신 질환을 앓던 둘째 딸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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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 신지로 (193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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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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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야마무라 신지로 |
원어명 | 山村 新治郎 |
출생일 | 1933년 4월 28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지바현 사와라시 |
사망일 | 1992년 4월 12일 |
국적 | 일본 |
정당 | 자유민주당→무소속→자유민주당 |
로마자 표기 | Yamamura Shinjiro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욱일대수장 내각총리대신 현창 |
친족 (정치인) | 아버지 - 야마무라 신지로 (10대) |
직책 | 제61대 운수대신 |
내각 | 우노 내각 |
취임일 | 1989년 6월 3일 |
퇴임일 | 1989년 8월 10일 |
직책2 | 제7대 농림수산대신 |
내각2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
취임일2 | 1983년 12월 27일 |
퇴임일2 | 1984년 11월 1일 |
직책3 | 중의원 의원 |
당선 횟수3 | 9회 |
선거구3 | 지바현 제2구 |
취임일3 | 1964년 11월 17일 |
퇴임일3 | 1976년 12월 11일 1979년 10월 8일 - 1992년 4월 12일 |
학력 | |
출신교 | 학습원대학정경학부 중퇴 |
2. 생애
1933년 4월 28일 지바현 사와라시(지금의 가토리시)에서 에도 시대부터 미곡상을 운영했던 유서 깊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정계와 인연을 맺었으며, 아버지 야마무라 신지로는 국회의원을 지냈다.[2][3]
지바현립 사와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살아있는 정치를 배우기 위해 중퇴하고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3] 1964년 아버지 사망 후 보궐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0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에서 인질을 자처하는 용기를 보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1975년 중의원 상공위원장을 지냈고, 1976년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1979년 다시 당선되었다. 1982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농림수산상, 1989년 우노 내각 운수상을 지냈다. 1991년 중의원 예산위원장을 역임했다.
1992년 4월 12일, 자민당 방북단 단장으로 북한 방문을 하루 앞두고 자택에서 정신 질환을 앓던 둘째 딸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야마무라 가문은 정치에서 멀어졌고, 그의 정치 기반은 지쓰카와 유키오가 물려받았다.
2. 1. 정치 입문
가쿠슈인 대학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3] 1964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2]2. 2. 요도호 납치 사건
1970년 3월 31일, 야마무라 신지로가 운수정무차관을 맡고 있을 때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요도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가 일으킨 이 사건으로, 야마무라는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운수상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가서 범인들과 협상했다. 야마무라는 승객들을 대신해 자신이 인질이 될 것을 자원하여 범인들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4][5]당시 대한민국은 일본과 수교 이전이었고, 북한과는 적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북한으로 가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설령 돌아올 수 있더라도 장기간 억류될 위험이 있었음에도, 야마무라는 인질을 자청하는 용기있는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영웅적인 행동으로 그는 '사나이 야마 신', '몸값 신지로'라는 별명을 얻으며 널리 알려졌다. 이후 4월 5일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으며, 승객 구조의 공로로 내각총리대신 현창을 수상했다.[4][5]
2. 3. 정계 활동
야마무라 신지로는 지바현 사와라시(지금의 가토리시)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아버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보궐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1970년 3월 31일,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당시 운수정무차관이었던 야마무라는 승객들을 대신해 인질을 자원하는 용기를 보여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1]
1975년 중의원 상공위원장을 지냈으며, 1976년 총선에서 낙선했다가 1979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1982년에는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1]
1983년 12월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농림수산상으로 입각했고, 1989년 6월 우노 내각에서는 운수상으로 재임했다. 1991년에는 중의원 예산위원장을 지냈다.[1]
2. 4. 사망
1992년, 자민당 방북단 단장으로 북한 방문을 하루 앞둔 4월 12일에 자택에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둘째 딸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일본국 헌법 시행 이래 살해당한 현직 국회의원으로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니와 효스케에 이어 세 번째 사례였다.[1] 둘째 딸은 아버지의 선거 유세도 도와주는 등 대외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였기에 후원회 관계자들은 야마무라의 후계자는 둘째 딸이라는 얘기도 자주 하고 다녔다.[1] 둘째 딸은 정신 질환 때문에 책임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어 불기소되었지만, 4년 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야마무라 사후 후계자 문제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가족 중 누구도 정치를 이어받지 않아, 정치가문으로서의 야마무라 가문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1] 1993년 총선에는 야마무라의 비서를 지낸 지바현의회 의원 지쓰카와 유키오가 야마무라의 기반을 물려받았으며,[1] 신생당, 신진당을 거쳐 자민당에 합류했다.[1]
3. 인물됨
야마무라 신지로는 학생 시절 복싱 선수로 활동했다. 현 고등학교 복싱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단련된 몸과 불굴의 정신을 지녔으며, 이는 위기 상황에서 과감한 실행력을 발휘하는 밑바탕이 되었다.[3]
1970년 요도 호 납치 사건 당시, 야마무라는 기자 회견에서 "정무차관은 맹장이라고 불리지만, 쓸모 있는 맹장도 있는 법이다"라며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4] 또한, 인질로 요도 호에 탑승했을 때, 범인들이 사과하자 "아니, 이걸로 다음 선거는 문제없어"라고 답하며 여유를 보였다.[5] (실제로 다음 선거에서 야마무라는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
취미는 바둑과 골프이다.[2]
참조
[1]
뉴스
山村元運輸相死去
交通新聞社
1992-04-14
[2]
서적
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3]
웹사이트
加藤万吉君の故議員山村新治郎君に対する追悼演説
https://kokkai.ndl.g[...]
[4]
서적
日本赤軍とのわが「七年戦争」 ザ・ハイジャック
文藝春秋
[5]
웹사이트
"「よど号」ハイジャック事件"
http://www.maroon.dt[...]
2018-06-22
[6]
서적
心は野にありて―回想録
朝日新聞社出版局
[7]
서적
歴史の十字路に立って 戦後七十年の回顧
PHP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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